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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의원

by 맘씨 posted Oct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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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도심에 위치해있어 주변이 대부분 높다란 빌딩숲이다. 그래도 직장인 유동인구가 많고 역시나 사람들 사는 곳인지라 드문드문 병원과 약국들이 자리하고 있다. 주말에 미처 집 근처 병원에 들르지 못했거나, 퇴근 후 내원하기가 좀 아슬아슬할 듯하면 아무래도 점심 시간을 이용해 직장 근처의 의원을 잘 찾아가게 된다. 

3분 거리에 생긴지 얼마 안 된 피부과가 있고, 전철역쪽으로 좀 걸으면 사람들이 꽤 많이 찾는 이비인후과와 산부인과, 안과가 나온다. 큰 길을 건너면 치과와 한의원도 보인다. 한 빌딩에 여러 개의 병원이 함께 모여있기도 하고, 근처마다 약국도 물론 여럿 있다. 모두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바쁜 점심시간 회사원들을 위한 신속한 업무처리가 돋보이는 의료기관들이다.

그 중 오늘 점심에 다녀온 ㄷ의원을 일기에 남겨두고 싶다. 내과가 전공이신 정 원장님께서 운영하는, 역 근처 오래된 건물 2층의 조그마한 의원이다. 

원장님은 1933년생, 그러니까 지금 연세가 88세이시다. 하얗게 샌 머리칼은 그마저도 거의 빠져 없으시고 등도 살짝 굽으셨다. 하지만 원장님의 눈빛에는 원로 노장으로서의 위엄과 청년의사 못지않은 총기가 담겨 있다. 언제나 깔끔하게 잘 세탁되고 다려진 흰 가운을 단정히 걸치시고, 두 명만 앉아도 비좁은 작고 낡은 진료실에서 열심히 진료를 보아주신다. 

원장님의 진료실에는 컴퓨터가 없어서 모든 입력을 늘 수기로 하시는데 얼핏 본 종이의 양식은 흡사 90년대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 와중에 천천히 써내려가는 글씨는 매우 명필이셔서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귀는 조금 안 들리시는지 질환을 여러 번 되물으시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리시며 진료를 마치시고 나면, 속삭여도 들릴 만한 거리에 자리하고 계신 수납창구의 유일한 간호사 선생님께 직접 종이를 가져다 주신다.

놀랍게도 수납창구 역시 컴퓨터가 없다. 모든 환자기록들이 책꽂이에 빽빽하게 이름순으로 쌓여져 있다. 예전에 ㄷ의원을 4년만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간호사 선생님은 놀라운 직감과 속도로 수많은 종이 가운데서 나의 예전 진료기록을 골라 빼는 내공을 보여주셨다. 접수를 받으면서도, 주사를 놓아주면서도 특유의 명랑한 성격으로 이런저런 말을 거시고, 궁금한 것도 넌지시 물어오는 아주머니같은 푸근함도 있다. 

오늘은 간호사 선생님께서 BTS에 관심이 많이 생기셨던 모양이다. 빌보드 1위와 2위를 동시에 석권했다며 어쩜 이렇게나 한국을 훌륭히 알리고 있다고 수다를 건네오신다. 저도 좋아해요 하니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한층 더 목소리가 높아지셨다가, 이야기 중 내가 아이 둘 엄마임을 들으시고는 한층 더 호들갑이시다. 우리 아이들 나이와 비슷하다는 본인 조카 사진들도 보여주시며, 의원 창구에서 환자와 마주보며 나오는 대화가 맞는지 희한할 정도의 분위기를 이어가신다. 

원장님이 컴퓨터를 안 쓰시니 간호사 선생님이 다시 써 건네주시는 처방전도 수기의 옛날 그 모습 그것이다. 이 수기 처방전은 의원 바로 밑, 역시나 의원만큼 오래됐을 ㄷ약국의 베테랑 할머니 약사님만이 완벽하게 처리가 가능하실 터다. 인자하고 친절하신데다 이 지역 터줏대감 약국의 주인장 같은 포스를 뽐내시는 약사님이다. 적어도 위 층 의원처럼 한 자리에서 수십 년을 지켜 오셨을거라 생각해본다.

처방약을 잘 받아 다시 사무실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생각해보니 오늘 들린 의원도 약국도 모두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많은 연식을 갖고 있다. 궁금함에 좀 더 검색해보니 원장님께서는 50년이 넘게 현재의 의원을 운영하고 계시고, 구 의사회의 원로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사회 산악회에 활발히 출석하시던 노익장의 선생님이다.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마음이 든다. 

나는 이 직장에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까, 그리고 몇 살까지 직장인으로 살 수 있을까. 50년은 물리적으로 말이 안될거고, 30년을 채울 수는 있을까. 언젠가는 ㄷ의원도 ㄷ약국도 문을 닫겠지. 어느 날 아파서 점심 때 찾아갔을 때 원장님도 선생님들도 안 계신다면 왠지 모르게 섭섭하고 아련할 것 같은데.. 

오늘 점심, 오래된 의원에 다녀오고 난 후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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