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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나의 독일유학기-만하임대 법대 박사과정 졸업(김용섭)

by 라키 posted Aug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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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일유학기

              나의 독일유학기-만하임대 법대 박사과정 졸업('92.7.15 - '95.1.14.)-
                                                               김 용 섭
                                  
 1. 처음에                                         6. 하이델베르크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 시절
 2. 유학경로                                       7. 나의 선생 로엘레케
 3. 독일에 대한 첫인상                             8. 목표로서의 논문 완성
 4. 만하임에의 정착                                9. 글을 마치며
 5. 만하임괴테인스티투트에서의 어학코스

1. 처음에
  필자는 총무처 국비장기훈련계획의 일환으로 1992년 7월 14일부터 1995년 1월 14일까지의 공식적인 파견기간동안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와 만하임 법대의 로엘레케 공법 및 법철학 연구소에서 공법을 연구하고 최근에 귀국하였다.
  독일에 파견 유학 중 나의 은사인 로엘레케 교수 밑에서 "한국과 독일에 있어서의 급부행정의 법률유보"라고 하는 박사논문(Dissertation)을 써서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는데, 종전에 법제처의 최정일 법제관을 비롯하여 약간명의 공무원이 총무처 국비장기훈련계획에 의거 독일에서 우리의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마기스터(Magister) 과정을 끝마치고 온 경우가 있었으나 파견기간상의 제약, 독일학제상의 어려움등의 이유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까지 마친 경우는 처음있는 일이므로, 필자의 주관적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세계화 실현의 기수로서 독일을 가려고 하는 공무원등을 위하여 어떻게 생활하고 왔는지를 학위목표적 관점에서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 나아가 독일에 적은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독일사회의 일부로 소개하는 것도 유의의 하다고 생각되어 부끄럽지만 몇자 적기로 한다.

2. 유학경로
  축구선수가 독일의 분데스리가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듯이 필자는 그 언제부터인가 법학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 건너가 체계적으로 공법학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그러한 학문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자주 다니던 동숭동의 독일풍의 맥주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사치스럽지 아니하고 단순한, 그러면서도 기본기가 충실한 그 무엇인가 독일적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유럽통합(EU)의 실현을 앞두고 있어서 앞으로 최대 단일시장 유럽에 대한 우리의 이해증진 내지 관심은 지금까지의 미국일변도에서 벗어나 점점 커질 것이라는 생각도 독일유학을 구체화시키는데 한몫 하였다.
  그래서 퇴근을 한 후 소주잔을 기울이는 대신 남산에 있는 괴테 인스티투트를 다니면서 기회가 닿으면 필드에 나가려고 인도아에서 골프연습에 골몰하는 사람처럼 어학의 기초를 빠른 속도로 다져나갔다.
  그러던 차에 뜻과 길이 병존하기나 한 것처럼 독일 유학을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바 외국어대학 어학연구소의 독일어강좌의 수강이 바로 그것이다. 외국어대학 어학연구소를 나가며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저녁나절 매일3시간 이상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른바 제1기 야간 독일어과정의 이수를 통하여 독학수준의 독일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어 좋았고, 시험을 앞둔 약 1달 가량을 집 주변 과천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독일어 공부를 한 결과 만만치 않기로 소문난 총무처에서 의뢰하여 서울대 어학연구소에서 치르는 독일국 파견 국비유학생시험에 통과된 것도 결코 놀랄 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 결과 경제적 곤란을 크게 느끼지 않으면서 내가 살던 고향을 벗어나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독일에 특별한 지식(Ahnung)이 없는 필자로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의 문제가 중요하면서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던 중 주한 독일상공회의소에 들러 연구소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공법연구소가 마침 하이델베르크에 있었다.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MPI fur ausl ndisches  ffentliches Recht und Volkerrecht)와 접촉을 갖은 것은 1992년 3월경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에 서신을 보내 가능성 여부를 타진하였는데 동연구소 소장(Leiter)으로 있는 Frowein박사가 객원연구원으로 오라고 서신을 보내와 이를 토대로 가족까지 Visa신청을 할 수 있었다.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가족Visa까지 막스플랑크연구소를 통하여 말끔히 해결되었는데, 요즈음 외국인의 유입을 막으려는 독일정부의 방침에 Visa문제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언제, 어디로 유학을 갈 것인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처해진 구체적인 상황조건적 결정에 따를 사항이라고 본다. 어쨌건 필자의 경우 한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므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 가서 자료를 모으고 한국에 와서 논문을 낼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단 독일에서 박사과정에 적을 두면서 대학의 분위기를 익히고 가능하면 독일에서 박사논문(Dissertation)의 작성완료를 목표로 두어 생활하는 것도 긴장감을 더해주고 의미있는 생활이 되리라는 판단아래 만하임 법대로 서신을 보냈던 바, 당시 학장이던 Burkhardt 형법교수로부터 지도교수(Doktorvater)를 Roellecke 교수가 떠맡기로 했다는 내용의 답신을 받게되어 만하임대학교 법과대학 및 로엘레케선생과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3. 독일에 대한 첫인상
  마치 알프스정복을 꿈꾸는 산악인 같은 느낌을 가지고 1992년 7월 21일 당시 4살된 큰애 세희(世熹)의 의연하고, 담담한 모습을 새기면서 가족과의 이별을 뒤로 한채 독일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에 혼자 몸을 실었다.
  외국을 여러 번 나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어쩌면 비행기를 타면서 그리 특별한 생각이 안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 처음 외국을 가는데다가 정든 가족, 친구, 삶의 주변환경과의 멀어짐에서 오는 아쉬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상호교차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가슴 가득한 희망과 기대가 주조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무엇인가 설정한 목표를 꼭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생각 내지 의지가 12시간여 동안 계속되는 비행기의 주행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 창가쪽에 자리를 잡은 데다가 날씨가 쾌청하여 창가쪽으로 시선을 던지곤 하였다. 내가 탄 비행기가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따라 내려 오면서 필자가 꿈에 그리고 동경해 마지않던 독일 상공에 진입한 후 얼마되지 않아 영롱한 무지개가 창 밖으로 펼쳐져 매우 고무되었다. 무엇인가 좋은 예감이 들었으며 하나의 수호신처럼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위로가 되었다.
  어쨌든 비행기가 고공을 낮추어 독일의 마을과 도시를 창 밖으로 내려다 볼 때 질서정연하게 잘 정돈된 촌락형태와 도시와 도시를 있는 아우토반, 넓고 푸른 목초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독일땅에 도착하기 전에 위에서 내려다 본 첫인상이다.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듯이 국가도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언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인상을 갖고 독일 땅에 내려 유고인이 경영하는 허름한 호텔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만하임에서 시내를 오가며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을 때 하나같이 자신의 시간을 아껴가며 친절함을 가지고 대해주던 미지의 독일시민들, 지도교수 및 학장과의 면담을 통하여 느낄 수 있었던 외국인에 대한 배려와 인간적 따뜻함을 느끼면서 당초 가졌던 첫인상이 편견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만하임에의 정착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막스플랑크공법연구소, 정확이 말하여 막스플랑크 외국공법 및 국제법연구소에 나가면서 각종 문헌과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데다가 만하임대학교 법대 박사과정에 적을 둘 수 있었기 때문에 어학장소를 만하임 괴테인스티투트로 정하였다. 참고적으로 만하임대학교에는 외국학생의 입학시험인 PNDS를 위한 어학코스를 개설하지 않고 입학 후의 외국학생들을 위하여 중급 내지 고급과정을 두고 있을 뿐이다. 만하임과 하이델베르크는 인접한 도시로서 Autobahn으로 약 20분가량 걸린다.
  독일에 도착한 후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 어느 쪽에 방(Wohnung)을 구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을 하였다. 연구소는 하이델베르크에 있지만, 괴테인스티투트와 대학은 만하임에 있는 데다가 하이델베르크는 관광지라서 물가와 집세가 매우 비싼 반면 만하임은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할 뿐만 아니라 집 사정도 좋아 결구 만하임에 정착하기로 작정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만하임으로 주된 활동공간을 잡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이델베르크는 차분히 앉아서 공부하기에는 주변환경이 너무 좋고, 한국관광객의 끊이지 않는 발걸음은 유학생의 처지를 우울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하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약 100㎞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서 대학이 도시의 중심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독일에서 가장 긴 바로크식의 성건물을 모두 대학건물로 쓰고 있다.
  만하임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남자(Mann)의 고향(Heim)"이 되는데 나의 경우만 놓고 보면 그 곳에 정착한 후 둘째아이 세중(世中)이를 그 곳에서 득하였으니 아들 낳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곳으로 유학을 가라고 추천해도 될지 모르겠다. Ohne Gewahr. 다만, 그 곳 유학생의 많은 사람이 딸을 낳는 것을 보면 도시의 이름이 무색해진다. 어쨌건 도시 자체의 분위기가 하이델베르크와는 달라 남성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만하임에 있는 유고인호텔에서 10일간 묵으면서 유고내전으로 그들이 느껴야 했던 고국에 대한 걱정스러운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주말이면 함께 모여 춤추고 노는 그들, 그리고 집을 구한다고 하니까 직접 따라 나섰던 한 유고인 할아버지가 생각이 난다. 그는 비록 짧은 기간동안 만났지만 맥주를 너무 자주 마신다는 것을 빼놓고는 순수함을 갖고 있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하이델베르크 막스플랑크연구소를 들러 오는 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식당(Mensa)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20년 가량된 빨간색 Volkswagen 골프를 사가지고 만하임으로 운전하고 왔다. 이 차는 오래되었음에도 귀국할 때까지 큰 고장 없이 잘 굴러갔으며 괴테인스티투트를 다니던 시절 안 타본 유학생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곳에서 약 10일간 지내다가 만하임 시내에 있는 대학기숙사로 옮겼다. Alfred-Delp-Haus라고 하는 카톨릭계통의 대학기숙사였는데 여름방학동안 임차해 주어 약 1달 가량 그 곳에서 독일대학생들과 지낼 수 있었다. 대학기숙사비는 대략 한달에 250마르크(한국돈 약 13만원)을 내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학비가 전액면제되는 독일대학에서 생활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하는 독일대학생들에 비하여 우리의 부모들은 너무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들은 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으며, 그러다보니 자연 검소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필자가 그 곳에 있는 동안 한번도 여학생이 제대로 꾸미거나 남학생이 양복을 입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한편 책을 많이 읽으면서 영화, 오페라등을 감상하고 평소 아끼고 절약하여 방학 중 어디론가 여행을 다녀오는 그들은 내적 충실을 위해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보름가량 있은 후 신문의 광고(Anzeige)를 보고 혼자서 방(Wohnung)을 구하였다. 처음에 주인과 전화로 통화하여 언제 방을 보러 갈 수 있느냐고 사전예약(Termin)을 하여 약속날짜에 그 곳에 가보니 경쟁자가 5명이나 있었다.
  처음 독일 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독일전역에 걸쳐서 주거사정이 안 좋다. 그들은 이를 "Wohnungsnot"이라고 말한다. 가족과 함께 출발하여 고생하는 것보다 방을 구할 때까지 먼저 가서 방을 마련한 후 가족을 입국시키는 것이 보다 낫다고 여겨진다. 처음에 방을 구하는 것도 공부이므로 유학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구하는 것이 둑일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에 있으면서 독일의 집을 구해 달라는 부탁은 독일적 상황하에서는 몇주 걸리는 어려운 부탁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집주인 Kanzian은 내가 그 집을 들어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공감과 한국정부의 장학금지급이 갖는 재정상의 신뢰도를 감안하여 나에게 그 집을 세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줄곧 독일체류기간동안 큰 부담과 불편을 느끼지 아니하고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지금껏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좋은 집주인을 만나는 것도 성공적인 유학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될 수 있다.

5. 만하임 괴테인스티투트에서의 어학코스
  만하임의 괴테인스티투트는 그 곳에서 실시하는 PNDS시험(독일대학입학어학시험)을 통과한 경우 독일 국내의 대학의 어학코스를 거치지 아니하고 독일 대학에서 실시하는 PNDS시험과 마찬가지의 효력을 인정하는 몇 안되는 괴테인스티튜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괴테인스티튜트에 비하여 PNDS를 준비하기 위하여 각국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아데나워 장학생이라든지 DAAD 장학생등 비교적 성실한 한국유학생들이 그 곳에서 어학을 다져나가고, 더군다나 한국의 우수한 공무원들이 그곳에서 성공적인 어학연수를 마쳐 한국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학이 안되고 전공공부를 한다는 것은 연습을 안하고 축구장에 나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찰을 해 보면 일본의 교수나 상사주재원들은 어학코스에 상당히 비중을 두고 언어를 철저히 익히는데 반하여 간혹 우리의 교수나 상사직원 같은 경우 어학코스를 등한히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독일의 일상생활이 아침 일찍 시작되는 관계도 있어 아침 8시부터 강의가 시작되므로 일찍 일어나서 가야 하며, 숙제(Hausaufgabe)를 많이 내주어 고등학생으로 전락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한국에 있을 때 문법이나 독해를 많이 준비하였으나, 일상회화라든지 청취력·작문등의 기회가 적어 처음에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기도 하였다. 열심히 하였다는 생각말고는 안든다.
  괴테인스티튜트 과정 중에 치른 ZDAF라는 중급과정의 어학시험의 구술고사에서 최고점수(Sehr gut)로 통과하였을 때 자신감이 붙었다. 만하임 괴테인스티투트에 나가면서 지도교수인 Roellecke 교수가 배려를 해 주어 박사과정에 등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전에 괴테인스티투트를 나가고 오후에는 세미나(Semina)나 강의(Vorlesung)에 참석해서 전문용어를 익히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각국에서 몰려든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각국의 문화나 풍습을 익힐 수 있었고, 가급적 독일어를 사용하려고 국적을 불문하고 아부 적극적으로 생활하였다. 한국유학생들과는 돌아가면서 주말 같은 때 음식을 같이 준비하여 담소하고 놀기도 하였다. 3월 중순에 실시한 PNDS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하이델베르크 공법연구소를 오가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쓸 논문의 자료도 모으고 만하임대학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슈파이어대학등 여러 독일 교수(예컨대 하이델베르크의 Brugger 교수, 슈파이어의 Hill 교수등)도 만나면서 폭넓게 현지적응을 해 나갔다. 어쨌든 부담이 그리 크지 않으면서 다방면으로 여유 있게 생활한 것 같다.
  만하임 괴테인스티투트에 다니던 중 둘째 아이를 출산하였다.
  3월 중순경에 PNDS시험을 보기로 되어 있는데 아이는 2월 26일에 출산하였으므로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독일에는 출산의 전 비용이 의료보험에서 부담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독일 자국민의 경우 출산률이 떨어져, 외국인 특히 결혼=출산이 등식화된 한국인과 같은 외국인이 잘 정비된 독일 산부인과의 시스템의 혜택을 보는 것 같다. 어쨌든 산모와 아기가 건강할 경우에도 최소한 6일 가량을 병원에 머무르도록 되어 있어 건강한 아이를 낳고도 충분히 병원에서 쉬다가 나올 수 있어 좋았다. 그 당시 괴테인스티투트를 같이 다니던 한국유학생이 10명 넘게 몰려 와서 축하해 주었으며, 둘째 아이를 건강하게 이국에서 낳은 기쁨을 감추고 싶지 않아 와인을 더불어 마시면서 함께 기뻐하던 얼굴이 아직도 아련히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오전에는 괴테인스티투트에 갔다가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애 세희를 데리고 집에 들러 미역국을 끓여 병원으로 가서 가족과 같이 보내다 밤 늦게 다시 집에 돌아 오는 일인 다역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어렵고 단란했던 순간으로 회상되는 그 시절이 유학생활 중에서 오래 기억되는 부분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6. 하이델베르크의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 시절
  만하임을 모르는 한국인은 많이 있어도 아마 하이델베르크를 모르는 한국인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에서도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데다가 네카강을 끼고 있고 경관이 수려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곳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일년의 약 300만명 가량 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만하임에서는 별 감흥이 없더라도 하이델베르크에만 가며는 왠지 모르게 정취와 낭만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독일에서는 관광지로서는 거의 압권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성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Neckar강의 잔잔한 물줄기와 고요하게 가지런히 놓여 있는 옛 도시의 모습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성 그 자체의 일부분이 헐어져 내려와 부서진 가운데 폐허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으며, Alte Br cke(넥카강의 옛 다리)에서 올려다 보는 성의 위용과 자태를 바라다 볼 수도 있지만 성 건너편 언덕에 있는 철학자의 길에서 성을 건너다 본다면 성의 모습속에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대비되어 권력의 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넥카강 다리 건너 신시가지쪽으로 건너가면 전차(Strassenbahn)의 종점에 다다른다. 우측 도로변 가로수 속에 놓여 얼핏 눈에 잘 안들어 오는 건물이 바로 Berliner Strasse 48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이다. 현재 동 연구소소장은 3인으로 되어 있다.
  Frowein, Wolfsrum, Steinberg 교수로 모두 하이델베르크 법대교수이면서 공법과 국제법의 권위자들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그 곳에 여러 명의 법학박사들이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온 공법학자와 실무가들이 그 곳에서 짧게는 1개월 내지 2개월간, 길게는 2년 내지 3년 가량을 머물면서 연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가끔 세미나를 개최하여 서로 토론에 참가하기도 하는 등 학문연구의 공간으로 탓할 수 없을 정도로 괜찮은 곳이다. 우리나라의 학자는 별로 다녀간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막스플랑크로 이끈 Frowein 교수는 권위있는 공법잡지인 A R의 편집인 중의 하나로서 그의 세미나 진행은 명쾌한 논리와 거침없는 해박한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끔 접촉을 한 바 있는 Wolfsrum 교수로부터는 친절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곳의 연구원인 Dr. Nolte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며, 이름을 잊어버린 프로바인 선생의 조수가 유럽법에 관한 각종 자료를 필자에게 제공해 주는 친절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 곳에 소장된 공법 및 국제법관계책자가 약 50만권 가량이 되어 독일 각지는 물론 이태리, 영국등지에서 자료를 얻기 위해 그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그 곳이 공법분야의 유럽 최대의 연구소라는 직원의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 공법학이나 국제법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한국교수들의 학위논문의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한글로 된 우리나라의 책자는 약간 낡았으며 단지 서고의 한 칸을 장식하고 있는데, 최근까지 가제작업이 된 영문 대한민국현행법령집도 구비하고 있는데 놀랐다.
  만하임과 하이델베르크를 오가면서 많은 좋은 추억들이 가슴속에 새겨졌으며 특히나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실의 고정멤버들 예컨대, 마틴, 스테판, 게오그, 콘스탄틴등이 점심시간에 이공계대학 멘자까지 걸어 가면서 함께 식사하고, 식후 돌아가면서 Kaffee에 초대(Einladung)를 하여 잔디밭에 앉아 여러 가지 내용의 주제로 토론을 하고 나서 막스플랑크로 되돌아오던 것이 선명히 떠오른다. 더운 여름 나절에도 선선한 연구실에서 모두 열심히 자신의 전공분야를 파고 들었으며, 가끔씩 무리를 지어 하이델베르크 뒷산으로 산책을 하거나 아니면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문 닫는 시간인 저녁 7시까지 책을 보다가 시내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짧은 유학시절이지만 독일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막스플랑크연구소에 나가는 동안 때때로 한국에서 법대를 오래전에 마친 박병관 선생한테서 가끔씩 고견을 듣는 기회도 갖었다. 그는 요즈음도 거의 매일 오전 중에 막스플랑크에 나와 독서를 하고 있다.
  늦게까지 Heidelberg에서 토론을 하고 밤늦게 어둠이 자욱이 깔린 만하임까지의 Autobahn을 20년된 나의 애차 폭스바겐골프(Golf)를 몰고 넘어 오던 생각, 독일 친구들과 늦게까지 성 위에 올라가 놀다가 오던 생각, 하이델베르크 Wiese라고 하는 잔디밭에서 더위를 피해 우리 애들과 집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서 밤 12시 넘도록 놀다가 오던 생각, 가족과 함께 하이델베르크동물원(Zoo)에 가서 동물 구경을 하면서 거닐던 생각, Neckar강변을 따라 언덕에 있는 집들은 보면서 드라이브하던 생각, 오덴발트라는 숲속에 수시로 놀러 가 물을 떠가지고 오던 생각...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이 하이델베르크와 어울어져 있다. 

7. 나의 선생 로엘레케
  내가 독일 가기 전에 만하임 법대 학장한테 편지를 보내 만하임 법대에 적을 두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로엘레케 교수는 나를 지도하겠다고 법대학장을 통하여 알려 왔다. 나는 편지를 써서 도착하면 귀하와 귀하의 대학을 방문하겠다고 답신하였다. 그 후 독일 만하임에 숙소를 정하고 난 이틀 후 Termin을 잡고 그 다음날 만났다. 그때는 한여름이었다.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교수방을 찾아 갔을 때 한분의 노교수가 자상하게 맞아 주었다. 그의 방에는 여러 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한 자리만 노란색으로 된 커다란 의자이고 나머지는 초록색의 보통의자였다. 그는 나에게 노란색으로 된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였다. 그는 타인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심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독일에 도착하기 전 일건서류를 미리 보았다고 하였으며 다소 어학의 수준이 입학을 허가하기에는 부족하나 한국에서의 사법시험은 독일의 국가시험과 동등한 효력이 있는 데다가 박사과정을 한국에서 마쳤으므로 어학을 1년 이내에 이를 보완할 것을 조건으로 곧바로 입학등록하는 것이 합목적적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써 주면서 학생처 외국인담당자에게 갖다 주라고 해서 92년 10월 15일에 시작하는 92/93 겨울학기에 곧바로 입학이 실현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리고 첫날 석종현 교수의 독일 박사논문을 본 적이 있느냐고 추천하면서 독일행정법의 입문서로서 참고가 될 것이라는 조언을 하면서 2달 후에 이에 관하여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독일신문에 난 한국에 관한 기사를 보내 준 다든가 내 논문과 관련되는 중요한 자료를 발견하면 알려주는 등 학문적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훤칠한 키에 다소 외관상 날카로운 인상도 엿보이지만 만하임대학에서는 영향력 있는 국제신사로 통한다. 학문적으로도 엄격하여 자신의 논거를 독특하게 전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논리와 관점을 일면 인정해 주는 포용력 있는 대학자라고 본다.
  그는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만하임대학의 총장의 역임등의 경력이 말해 주듯이 대학행정에도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간직하고 있다. 그를 통하여 학문적 연구방법은 물론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그의 태도를 통해서 배웠다고 생각한다.
  매년 정초에 그의 책임하에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주말세미나(Wochenendeseminar)를 개최하였는 바, 팔츠발트에 있는 Hotel에 묵으면서 실무자(예컨대, 헌법재판소재판관, 교육부차관, 지역사령관, 기업체간부, 변호사, 판사)와 대학종사자(박사과정, 교수등)와의 이론실무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체류중 2번 모두 참석하여 토론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특정재단의 후원아래 로엘레케의 주도하에 세미나가 진행되었는데 그의 초대를 받은 참가자는 식사비와 숙박비가 전액 무료이었으며 이 모임을 매우 열정적으로 이끌어 가는 로엘레케 교수의 세미나진행방법으로 인하여 매우 진지하고 심도 깊은 논의가 있었다. 참가자는 대략 45명 정도 되었는데 대학종사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실무자는 주로 연사로 등장하였다.
  언젠가 집에서 공부하기 힘든 사정을 말하였더니 교수나 조수에게만 허용되는 만하임대 법대도서관 열쇠를 대여해 주어서 커다란 도서관에 폐관시간인 저녁 9시 반이 넘은 다음에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토, 일요일 또는 휴일에도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 아들 세중의 첫돌 때는 그를 초대하였는데 바쁜 시간을 내주었고, 당시 초대받은 한국유학생들과 밤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다 갔으며,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3일전 우리가 자동차를 처분하였다고 하니까 그는 우리 가족을 자신의 차에 태워 바인하임에 있는 뉴코리아라고 하는 한국식당에 가서 작별회식을 시켜 주었다.
  둘째 녀석 세중이를 안고 가면서 마치 한국의 할아버지 같은 따뜻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관심은 점점 깨지고 있는 독일가정을 동양적 모델로 복원시킬 수 없는가 하는 바램을 갖고 있는 것을 그의 논문 "Kinder, Kinder"(NJW 1994, 19호, S.1263f. 그 곳에 필자의 세미나에서의 발언이 인용되어 있음)를 통해 알 수 있었으며 다른 것은 몰라도 독일의 가정은 개인주의의 지나친 확산으로 인하여 매우 위기상황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줄 안다.
  그는 매주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간 강의가 있는 날이면 점심때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학생들 틈에 끼어 담소를 나누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상기한 바와 같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요즈음도 정열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Roellecke는 나의 학문적 스승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생의 모범으로서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Roellecke 스쿨의 일원이 된 것에 대하여 솔직히 무한한 자긍심을 감출 수 없다.

8. 목표로서의 논문완성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일의 법과대학에서 외국인 학생, 특히 한국학생에게 우리의 법학석사과정에 해당되는 마기스타 과정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기스타 과정은 미국의 L.L.M. 과정을 도입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다시 말해서 박사학위과정의 전단계에서 독일법 전반의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2 내지 3학기의 기간 동안 소정의 세미나 학점을 따고 약 80페이지 전후의 마기스타아르바이트를 쓰고 간단한 구술고사를 통과하면 마기스타학위를 받을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마기스타의 작성이 면제되어 일정기간의 시간적 절약을 꾀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각 대학의 박사과정규정(Promotionsordnung)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본인이 박사과정의 입학허용요건에 해당하는지 어떠한 사전요건(예컨대, 마기스타, Klausur)을 충족하여야 하는지를 모르고 서는 시행착오를 겪거나 독일유학생활이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지도교수의 선정은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 하면 박사과정규정은 지도교수도 지켜야 하는 한계규정이기 때문이다. 단순도식하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위과정의 이수는 유학생의 근본목표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유학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줄곧 그 곳에서 논문완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유학은 독일사회보다도 한국사회를 보다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위논문의 완성에 있어서 지도교수가 얼마나 열심히 지도하는가 하는 주관적, 인적측면이 매우 중요하다. 지도교수와 박사과정학생(Doktorand)과의 관계는 마치 도제적인 관계이면서도 독일의 교수는 함부로 박사학위를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법대졸업생 중 가장 우수한 자들이 박사학위논문과 더불어 교수자격인정논문인 하빌리타찌온을 작성한 후 법대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독일을 우리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할 것인가  독일에서 박사논문의 경우 일반적으로 2개의 징표를 논문통과의 요건으로 본다. 첫째로 독창적으로 학문발전에 기여하였는가, 둘째로 그 논문을 책으로 출판할 가치가 있는가를 본다.
  어쨌든 필자는 괴테인스티투트의 어학과정이 끝나기 무섭게 지도교수를 찾아가 논문제목을 정했다. 당초 정한 것은 "급부행정의 행위형식과 이에 대한 법원의 통제"라는 테마였는데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너무 광범위한 테마라는데 착안 도저히 2-3년 내에 끝내기 어려운 테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제목의 선정 후 교수가 좋다라는 말이 나오면 논문의 반은 완성되었다고 말해도 좋다. 그만치 논문의 제목을 잡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던 차에 당초 제출한 목차(Gliederung)의 한 부분인 "급부행정의 법률유보"에 한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수인 Huba의 의견을 반영, 지도교수에게 말하자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혼쾌히 허락하였다.
  그래서 비교법적으로 논문작성을 하려고 하여 한국에 관한 자료도 찾아보았으나 이 분야에 대하여 깊이 있는 연구는 없고 독일법의 부분적 소개차원에 머물고 있어 우리의 학문적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다소의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따라서 논문의 목표와 방향도 비교를 해 나가되 한국의 법률유보가 갖고 있는 문제지적과 독일의 사례를 통하여 본 새로운 이론전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촛점을 맞추었으며 , 나름대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해 보았다. 이른바 "분별화된 정당성유보이론"(Differenzierte Legitimationsvorbehalte)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머지 않아 장래에 이에 관하여 논문발표등의 형식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수립한 이론을 한국에도 소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어쨌든 독일의 자료를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읽어 가면서 10여년 전 고시공부하던 대학시절로의 회귀를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만하임 법대 건물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였으며, 그들의 휴일인 토요일, 일요일도 계속 나왔다.
  행정법의 대가 Schenke 교수가 가끔 내려와 열심히 공부한다고 용기도 주었으며, 몇 년 전 한국에도 다녀간 바 있는 한국통 Taupitz 교수는 학장으로 있으면서 친형님처럼 잘 대해 주었다.
  주로 나가는 공부장소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나가는 하이델베르크 막스플랑크 공법연구, 그리고 낮 동안에는 만하임의 A3도서관, 저녁식사 후에는 길 건너편 만하임대 법대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집에 돌아와 밤중에 애들 재워 놓고 컴퓨터 작성으로 이어지는 단순 반복의 생활이었다.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 어디 여행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하였다. 고작해야 가끔 주말에 만하임에 있는 잘 가꾸어진 공원에 가서 쉬다가 오는 것이 그 전부였다.
  막스플랑크에 있는 독일친구들한테 여행은 학창시설과 노인들이 다니는 것이지 우리 나이에는 여행을 다니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농담을 건네곤 하였다.
  물론 논문이 마쳐지면 여행할 계획은 당초 유보되어 있었다. 문제는 논문을 다 마치고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나 자신의 견문을 위하여 여행을 할 시간이 있을 것인지가 불확실하였다.
  논문의 작성과 완성에 이르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일련의 단계를 거쳐 완성해 나가는 것 같다.
  앞으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하려고 계획하거나 관심있는 독자를 위하여 하나의 참고적 조언을 주기 위해 이에 대해 언급해 보기로 한다.
  테마선정이전에 기초적인 자료의 확보가 중요하며 너무 연구자료가 부족하던지 너무 많던지 하는 테마는 그리 좋은 테마가 아닌 것 같다. 가능하면 독일 문헌을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으므로 큰 방향설정은 독일 출국 전에 교수와의 서면접촉단계에서 논의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다음이 목차의 작성이다. 목차는 논문을 작성하면서 여러 차례 바뀌면서 세분화될 수밖에 없는데 목차라는 큰 윤곽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나침판 없이 항해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상세한 목차의 작성에 앞서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영역의 범위를 개관할 수 있도록 가급적 관련논문을 빨리 읽어야 할 줄 안다.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처음부터 한 가지 문헌만을 가지고 완벽하게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짧은 기간 내에 도저히 논문의 완성을 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년동안에도 한 분야에 엄청난 분량의 물량이 독일학자들의 저술활동 속에 나타난다.
  언젠가 느꼈지만 자신의 복사량 만큼을 매일 읽는다고 해도 새로운 문헌의 양을 도저히 따라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 목차가 작성이 되고 나면 정독을 하면서 논점별로 주요한 논문을 생각하면서 읽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2가지 노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형식적 측면에서 독일어 어법 내지 표현방식을 기재하는 노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중요내용을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을 수 있는 화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주 쓰는 표현의 모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 좋은 착상이나 생각 및 다른 입장에 대한 비판 내지 고유한 생각을 기재해 두는 노트가 바로 그것이다.
  독일어가 외국어인데다가 책을 읽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생각 중에 적절히 메모해 두는 것이 나중에 기억의 재생을 돕고 실제 논문작성단계에서 많은 도움을 가져다 준다.
  자료를 어느 정도 읽고 나름대로 방향이 설정되면 논문을 작성하는 단계에 돌입한다.
  필자의 경우 '93년말부터 실제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다. 왜냐하면 법률적 문장을 독일어로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진도도 안 나가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큰 욕심을 안 내고 우리말로 쓸려고 하는 요점적인 내용을 일단 적어두고 이를 토대로 글을 작문하는 방식으로 써 나갔다. 그 사이사이에 독일학자들의 주장과 논증을 정리해 나갔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타이틀 속에 자신이 쓰려고 하는 내용이었다. 크게 도식화한다면 문제의 설정, 다른 사람들의 견해, 자신의 입장이 주된 논리의 진행방식이었다. 문제의 설정이 처방보다 어려운 과제였다.
  독일의 경우 박사논문완성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도교수에 따라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글을 써 나가면서 일정 부분을 쓰면 지도교수에게 제출하여 평가를 받고 교정하거나 보충하는 방법과 아예 끝까지 다 쓴 다음에 제출하는 방법이 있다. 교수의 방식에 따라 달라지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필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방법이었으므로 최소한 한달에 2번 정도씩 지도교수와 만나면서 토론하고 보완하면서 논문을 진행해 나갔다. 
  후자는 근본적으로 방향이 틀렸거나 교수가 의도하는 방향과 상치될 때 많은 부분을 새로 써야 하기 때문에 위험부담(Risiko)이 크다. 이에 반하여 전자의 전자의 방법은 써 나가면서 방향수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어 순간적 대처가 가능하나, 계속 줄기차게 진도를 내야 하는 심리적 부담감을 무시할 수 없다. 일찍 마치려는 의지가 확고할 때에는 가능한 한 전자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권장할 만하다. 지도교수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하고자 할 때 도와주지 그렇지 않는 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보통의 경우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92년 7월에 총무처에서의 파견기간이 2년의 기간이 만료되는데 그 기간까지논문을 통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94년 5월경에 파견기간 연장신청을 하여 이의 승인을 얻었다.
  이제 남은 기간은 '95년 1월 15일까지 쓸 수 있는 기간이었다. '94년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지만 더위도 잊은채 막판 초읽기에 들어갔다.
  계산상 10월 말일까지 제출이 되어야 지도교수가 논문을 읽고 주심교수의 평가서(Erstegutachten)를 써 주고 제2심사교수의 평가서(Zweitegutachten)가 붙어야만 구술고사(M ndliche Doktorpr fung)를 치를 수 있었다.
  막스플랑크 공법연구소와 만하임대학 도서관, 집을 오가면서 10월 20일 논문의 초고를 완성할 때까지 그야말로 힘든 시련의 연속이었다. 힘들면서도 불러오는 산모의 배처럼 논문이 어느 정도 두꺼워지는 것을 보면서 뿌듯함도 있었다.
  문제도 지도교수가 잘 썼다 하는 말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말은 수도승에게 하산할 준비를 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해 9월말 이미 나의 지도교수는 150여 페이지 가량을 읽고는 조금 더 분발하라고 하고는 끝가지 다 쓰고 나서 가지고 오면은 박사논문의 통과여부를 말하겠다고 하여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었다. 10월 30일 약속이 되어 있어 지도교수에게 가니까 비서를 통하여  Herr 김 커피 한잔을 갖다 주라고 하면서 밝은 모습의 얼굴을 띠었다.
  지도교수가 논문을 심사·지도하면서 그 날처럼 밝은 모습을 띤 적도 없었다. 언제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한국부분이 왜소하여 이를 보충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태도의 변화였다.
  단지 로엘레케 선생은 "잘 했다", "수고했다"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학장실에 3부를 공식적으로 제출하라고 알려 주었다. 데펜호이어 교수의 평가서가 빠른 속도로 이루러 졌고, 94년 12월 1일로 구술고사의 일정이 잡혔다. 구술시험위원으로 있는 쿠울렌 교수의 일정상 약 1주일 가량 빨리 잡힌 셈이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술고사에 매달려야할 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논문제출하고 나면 독일 몇 도시를 돌아보자는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주말을 이용하여 베를린과 드레스덴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1일 독일 법전을 휴대하고 1시간 동안 4과목의 교수가 출제하는 과목당 2 내지 4개의 케이스문제를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형식으로 풀어 나갔다. 모든 일이 잘 끝났다. 구술고사를 합격한 날이 우리의 졸업식에 해당하는 날인 셈이다. 독일에는 특별한 학위수여식이 없다. 까운을 입는 법도 없다. 박사학위모자도 없다. 싱겁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그들의 모습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다고 본다. 구술고사는 박사학위취득의 본질적 요건으로서 대학마다 시험방식이 약간씩 다른데 필자가 속해있던 만하임 법대의 경우 구술시험과목이 공법(헌법, 행정법), 형사법, 민법 그리고 선택과목(법철학, 유럽법, 경제행정법 etc)으로 되어 있다. 구술고사를 보기 15일전부터 독일친구와 점심식사 후 토론을 하는 등 이에 대비하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결과는 만족할만 했다.
  구술고사를 치른 후 프랑크푸르트 한국떡집에서 주문한 떡을 가지고 온 민사소송법을 전공하는 김상일 선생 덕분에 로엘레케연구소에서 독일의 관례대로 한국 유학생, 구술시험 교수, 중국출신 유학생 친구, 비서 그리고 우리 가족과 가벼운 파티를 하면서 짧고도 긴 여정에의 성공적인 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9. 글을 마치며
  두서 없이 글을 쓰다보니 너무나 주관적 경험의 편린을 나열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어쨌든 외국유학은 전공분야에 대한 시야의 본질적 확장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폭도 넓혀 준다고 하는 점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나의 독일체류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집약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조직적, 체계적으로 움직여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하나의 논문의 완성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은사인 로엘레케 교수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폭넓은 지원과 수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대화용의(Gespr chbereitschaft)를 보여 주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역할을 충실히 못한 점을 부인할 수 없으며, 독일 체류기간 동안의 장학금을 지원하여 준 대한민국정부를 비롯하여 연구공간으로서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고마운 존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삶의 한 단면 속에 개인적으로 짧지만 응축된 추억을 가지고 귀국하였는 바 지금도 가끔 고향을 떠나온 사람처럼 지금도 낯익은 정열과 힘의 도시 만하임의 추억과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의 거리거리가 뇌리 속에 뚜렷이 각인 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법학박사, 법제처 제2국 사무관)

 


인용

법제, 법제처, 1995, 5, 최종방문일: 2017. 8. 4., http://www.moleg.go.kr/knowledge/publication/monthlyPublicationSrch.jsp?searchCondition=ALL&searchKeyword=의료&pageIndex=58&mpbLegPstSeq=129377

 

후기

우연히 김교수님의 유학 수기를 읽고 반가운 마음에 게재합니다. 교수님의 열정적인 유학생활에 감탄했다는 말씀 이 자리를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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