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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by 맘씨 posted Sep 0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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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우산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비오는 날 출근이나 외출을 할 때면 집 우산장에 꽂혀진 네다섯 개의 우산 중 아무거나 집어들었다. 그 날의 선택이 삼단의 작은 남색 우산일 때도 있고, 가벼운 투명 비닐우산인 적도 있으며, 가방이 무겁지 않은 날에는 묵직한 검정 장우산을 골라 나가기도 했다.

욕심이 없으니 애정 역시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지하철, 버스정류장, 식당 등에 우산을 놓고 나와 잃어버린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도 '아 맞다 우산...' 하며 몇 분 아쉬워하다 말곤 했다. 사실 내가 갖고있던 대부분의 우산은 대부분 회사나, 어디어디 행사, 어느어느 전시회 등에서 받은 것이었고 나머지는 급한대로 가까운 편의점에서 그때그때 구입해 둔 저렴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덜했던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어제의 일이다.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이었고, 새벽부터의 내 컨디션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얼른 출근해서 확인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는데다 올라오던 태풍의 영향때문에 비바람까지 꽤 거세었던 날이다. 침대에 마냥 누워있고 싶은 축 쳐지던 날, 나는 힘겹게 출근준비를 마치고 평소처럼 아무렇게나 우산을 집어들어 집을 나섰다. 

비가 사방으로 바람에 날리고 거리는 움푹 패인 곳마다 빗물이 들어차 신발이 다 젖어버렸다. 어깻죽지와 치맛자락도 빗방울에 축축해져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춥고 오슬거렸다. 비틀거리며 겨우 들어선 지하철 개찰구, 그런데 우산을 접고 본 내 손바닥과 손가락이 온통 까맣게 변해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불쾌감도 불쾌감이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황당함이 먼저다. 어리둥절 당황한 채 허둥지둥 출근길 전철에 탑승한다. 급한대로 핸드백 속 물티슈를 꺼내 손을 빡빡 닦아보지만 새까만 검댕같은 작은 물질들은 쉽사리 지워지질 않는다. 

사무실 내 자리에 앉고나서야 찬찬히 상황을 살펴볼 여유가 생긴다. 문제의 원흉은 우산 손잡이에 가득 묻어있던 플라스틱 필름 조각들. 집 근처 다이소에서 별 생각없이 구입했던 이 저렴한 우산의 까만 손잡이는 제 수명이 다한건지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코팅된 필름이 모두 녹고 긁혀지고 벗겨져 쇳가루처럼 내 손에 모두 들러붙은 것이다. 

한참 씻고 닦아 손에 묻은 것들을 겨우 떼냈다. 휴대폰, 지갑에까지 묻어난 검은 가루들도 모두 싹싹 지웠다. 이 모든 원인 제공자인 우산은 무심한 듯 내 자리 곁에 세워져 있다. 그래도 우산인데 나중에 또 써야지 하는 본전찾기의 마음이 슬쩍 올라와, 수습해볼 요량으로 손잡이를 테이프로 살살 감아본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를 오늘 아침 내내 고생시킨 이 아이에게 이런 수고스러운 노력까지 들여야 하는가.'

우산을 바라본다. 오늘 내가 들고나온 우산. 단돈 3천원짜리 우산. 2년쯤 쓴 것 같은 우산. 손잡이에 테이프 비닐이 반쯤 말려 덕지덕지한 우산. 잡아 들 때마다 내 손에 까만 흔적을 계속 남길듯한 우산. 어디 실수로 꽂아두고 나와도 아무도 안 가져갈 듯한 우산.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우산이, 내가 갖고있던 그동안의 우산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다는 걸. 나에게 우산이란 인생에서 별 의미도 없는 거였고, 욕심나는 물건도 아니었으며, 어떤 애정도 관심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의 그 생각은 이제 달라졌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당해봐야 깨닫는 거고,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절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우산과 나는 어제자로 영원한 작별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와 꼭 잘 맞는, 나만의 멋진 우산을 제대로 하나 욕심내 볼 예정이다. 그 우산에 이름표도 달고, 깨끗하게 보관할 거다. 절대로 어디 흘리거나 안 잃어버릴 거고, 늘 깔끔하고 단정하게 다룰 거다. 비오는 날마다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고이 소중하게 집어들어서, 손에 착 쥐고 오랫동안 많이 예뻐해 줄 테다. 

그렇게 나와 평생 함께할 우산.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우산. 세련되면서도 나만의 느낌에 팍 꽂히는 그런 우산! 어제의 비가 거짓말처럼 말끔히 그친 오늘 아침의 출근길, 나는 또 열심히 인터넷 쇼핑을 하며 욕심 내지 애정 가득한 심정으로 오매불망 "내 우산" 을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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