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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12년 전 기억

by 맘씨 posted Mar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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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서 거실로 향하는 통로 한 켠에 사진들을 걸었다. 얼마 전 이케아에서 구입해 온 8개들이 흰색 액자다. 예전 결혼 사진부터 아이들 어릴적 사진, 남매 함께 찍은 사진, 가족 사진, 여행 사진 등을 차곡이 넣어주니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카메라 촬영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서버에는 15년 세월 수천 장의 사진 기록들이 쌓여있지만 정작 집에 액자화를 해놓은 적은 많지 않았다. 이제사 집 입구에 액자를 꾸며두니, 들어오면서부터 더 화사하고 정다운 분위기가 나는 것 같다.

액자 중 하나에 큰애 9개월 때의 아기 사진이 들어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오동통 살이 오른 볼따구는 양 옆 모두가 발그스름하다. 땡글땡글한 눈 안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오동통한 작은 손으로 목에 걸린 공갈젖꼭지를 꼭 쥐고, 엄마 품에 폭 안겨서 아빠의 카메라를 신기한 표정으로 응시하는 중이다. 12년 전 여행지, 경주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도 남편도 경주를 좋아하는데다 시댁과도 멀지 않아서, 결혼 초기 아이 데리고 꽤 자주 갔었다. 숙소는 대부분 회사에서 제공하는 대명리조트였는데 묵기에 무난했는데다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특히 좋았다. 어스름이 질 무렵 도착해 방을 배정받고, 입실해 커튼을 촥 펼치면 한 눈에 들어오던 보문 호수의 풍경. 어느새 잠이 깬 아기를 안고 뉘엿뉘엿 노을지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독도 피로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잠시 실내에서 쉬다 초저녁 채비를 갖춰 아기띠에 아들을 안고 밖으로 나가면, 경주 곳곳 왕릉의 부드러운 능선이며 고즈넉한 거리의 분위기가 얼마나 좋던지. 당시 옹알이만 하던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도 계속 건네면서, 우리는 경주 유적지 이곳저곳을 열심히도 걸어다녔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기띠 안의 아들은 두툼한 옷차림에 엄마아빠의 패딩까지 한번 더 둘러 안겼으니 마냥 따뜻한지 방실방실이었다.

이렇듯 겨울에 자주 찾아서인지 나에게 경주는 찬 공기의 한겨울 이미지다. 학창시절 수련회와 수학여행은 봄가을에 갔었고 역시 모두 경주였지만 그 시절엔 큰 감흥도 재미도 없었다. 아름다운 도시 경주의 매력은 내게 한참이 지나 다가왔던 것이다. 볼이 시리도록 춥던 겨울날, 갓난쟁이를 안고 감탄하며 걷던 천년거리의 능선과 하늘빛, 차가운 바람은 내겐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순간을 만들어주었고 아이의 꺄르르한 웃음과 미소 역시 더없이 벅찬 행복감이었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 겨울의 경주가 몹시 그리워진다. 우리 둘 다 참 젊은 부부였다. 자주 즉흥적이었으며 때론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매번 우왕좌왕했지만, 우리 품에 폭 안기는 아기의 체온이 신기할 정도로 따스해서 자꾸 웃음이 났고, 또 무척 감격스러웠다.

내 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빙긋 웃으며 꼬물락거리던 그 작던 아이는 벌써 14살이 되었다. 그 때 함께 맞던 경주의 찬 바람, 어스름지던 저녁노을의 빛깔을 아이는 기억할까? 액자 속 아기 얼굴과 훌쩍 큰 아이 얼굴에 번갈아 눈길을 주어본다. 불현듯 다시 한 번, 추운 겨울날 아이 손을 잡고 아름다운 경주의 길을 걷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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