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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

by 맘씨 posted Jul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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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 치과에 가서 사랑니를 뽑았다. 4개 중 마지막 하나 남아있던, 입 왼쪽 위 상악골에 위치한 치아였다. 나머지 3개는 어긋나게 올라왔었는데다 치과의 권유도 있었는지라 내 나이 스물 언저리에 모두 발치했었다. 당시 대학 치과병원을 네다섯 번씩 오고가며 꽤나 고생을 했던 기억이다. 선천적으로 사랑니가 안난다는 사람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청춘시절의 꽤나 괴롭던 추억거리다. 

남겨뒀던 사랑니 하나는 뿌리도 잘 잡혔고 다른 어금니와 조화를 잘 이룬다는 말에 놔두던 거였다. 늙어 나중에 틀니를 끼우거나 임플란트 자가치아 이식을 하기에도 쓰임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여하간 치아를 하나라도 더 보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덧 그 세월이 20년이 흘렀다. 그간 칫솔이 잘 닿지 않아 양치가 좀 힘들다는 점 말고는 별 통증도 불편함도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얼마 전 종합건강검진 때, 사랑니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치과의사가 하시던 말.

"보니까 이제는 이 사랑니도 발치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권장해드려요."

이제는. 그 말 안에 여러 의미가 있다. 그간 잘 버텨준 단 하나의 사랑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소중히 다뤄주지 못한 무심한 주인에 의해 여기저기가 마모되고 상처나고 못나지고 말았다. 급기야 충치가 생긴 듯 하다는 선생님의 말과, 찍어본 치아사진으로 마주한 볼썽사나운 내 사랑니의 험한 모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제는" 뽑아야 할 때였다.

여지껏 충치없고 때운 이빨도 없었다는 자부심, 타고난 건치인이라는 내 근거없던 자신감은 이번 일로 확실한 타격을 입었다. 깊이 자리한 사랑니가 세월이 가며 조금씩 상해가는 것을 모르고, 칫솔질을 할 때마다 신경써서 꼼꼼하게 다뤄주지 못했다. 결국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발치하게 되었으니 아쉽기도 하고 후회도 되고 묘하게 이것저것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사랑니 뿌리가 깊은 편이라 해서 발치 전 엑스레이와 치아 CT도 찍었다. 의자에 누우니 겁도 왈칵 났지만, 20년 전에도 세 개나 뺐는걸 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아이들 치아를 몇 년째 믿음직하게 봐주고 계신 동네 치과 원장님, 마취 후 약 10여분을 이리저리 처치하시더니 단번에 쑥 뽑아주셨다. 과연 능숙하고 노련하신 선생님이다. 

거즈를 두시간 꽉 물고, 얼음 찜질도 좀 하고, 타온 약도 먹으면서 발치한 하루의 오후를 보냈다. 조금 이따가는 다시 치과에 소독을 하러 가야한다. 종합건강검진 앞두고 한 달 금주했었다가 며칠 전 해금되었는데 또다시 일주일 금주 및 무리한 운동 금지가 지시사항으로 내려왔다. 이번 봄에 이래저래 금주를 꽤 오래 해서 내 건강이 아주 좋아질 것 같다. 좋게 생각하련다.

거울을 보니 여전히 살짝 부어있는 왼쪽 볼이다. 완전히 아물려면 20일쯤 걸린다는데, 뽑힌 이빨 하나가 얼굴에 안겨주는 후유증이 보통이 아니다 싶다. 곧 우리 아이들도 사랑니로 고생하는 시기가 닥쳐올 거다. 누구나 관문처럼 맞이하는 사랑니이니 부디 덜 아프게 바로나서 관리가 되길 바랄 뿐이다. 오래 앓던 이를 뽑으면 속시원하다는 속담도 있는데 나는 왜인지 좀 허전하고, 또 뭐 시원섭섭도 하고 그렇다. 

사랑니 하면 이름 때문인지 뭔가 풋풋하고 청춘의 시절 느낌이 물씬 났는데, 이제 그런 사랑니는 내게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간직하던 하나의 사랑니는 나 아직은 그래도 젊지 하는 혼자만의 자부심 혹은 어떤 표식이 되어준 것도 같다. 바야흐로 이 봄이 내 사랑니 상실의 계절이 되었구나. 오랫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함께한 마지막 사랑니에게 아쉽고도 후련한 작별의 인사를 보낸다. 굿바이, 내 젊음을 함께한 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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