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맘씨톡톡

나의 시절, 중랑의 봄

by 맘씨 posted Jul 11,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7회 중랑신춘문예 수필부문 수상작-

 

봄이 찾아왔다. 참 길고 지난했던 작년 한 해다. 유래없던 전염병의 위협에 삭막하고 불안했던 겨울의 나날이 모두 지나니 다시 봄이다. 사방이 봄기척, 봄기운이다. 대지에는 초록 풀들이 새초롬하게 돋아나고, 추위에 움츠러있던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조금씩 새순을 밀어내며 제각각의 꽃망울 터뜨릴 준비를 마친다. 벌써부터 샛노란 산수유며, 연분홍한 복사꽃과 새하얀 목련이 군데군데 활짝 피어나 눈을 즐겁게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이다. 대자연이 새로 태어나는 귀한 봄날이다. 

내게 중랑은 시작하는 봄의 풍경, 설레이는 봄의 이미지이다. 언제나 그랬다. 15년 전 봄, 신혼생활을 중랑에서 시작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곳인데다 남편의 첫 발령지에서 가까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중랑구 이외의 선택지는 내게 없었다. 처음 보러갔던 신혼집 아파트는 봉화산의 한 자락을 끼고 있는 듯 소담하니 아늑했고 주변 공기까지 너무나 맑고 청량했다. 여기저기 발품 팔며 다른 곳 볼 것 없이 바로 계약을 했던 기억이다. 

젊고 한창인 시절이었다. 신혼의 단꿈이 가득한 부부의 마음은 봄볕 포근한 햇살마냥 내내 따뜻하고 일렁일렁했다. 신혼집이라는 큰 숙제를 덜었는데다 포근하고 고즈넉한, 쏙 마음에 드는 곳에서 둘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살갑게 좋았던가. 마음까지 푸근하게 바로 근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다는 점도 나를 어찌나 기쁘게 했던지, 집을 마련한 후 전해드리니 너무나 좋아하며 반가워하시던 두 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하다. 

중랑에서 노년기의 대부분을 보내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지역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다. 아파트 단지의 주변 길, 동네 성당과 병원, 산책로, 가게 등을 찬찬히 거닐며 다니셨다. 2세와 3세가 우르르 모일 때면 집 안이 꽉 차 복작복작 소란하고 떠들썩했다. 할아버지 집 베란다 통창 너머로는 경의중앙선 상봉역 기찻길이 내려다보였고 시시때때로 기차가 장난감처럼 칙칙거리며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그 기차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고향인 평창까지 바로 가는 평창행 KTX가 개통되었을 때는 특히 기뻐하셨다. 

우리 부부 역시 신혼집과 동네에 나날이 담뿍 정이 쌓였다. 퇴근 후 봉화산역에서 자주 만났는데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 정겹고 좋았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마자 봉화산의 시원한 산기운, 산들바람과 촉촉한 공기가 코와 입으로 느껴졌다. 저녁을 먹고서는 단지 둘레길을 도는 마실을 자주 나갔고, 맥주 한 잔을 기울일 노천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봉화산 주변을 돌며 서로의 사진을 남겼다. 봄꽃 같던 시절이었다. 

꿈같던 신혼은 그렇게 흘렀다. 첫애를 낳은 계절 역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이었다. 만개한 벚꽃나무 가로수의 꽃잎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내 가슴이 한없이 뛰는 것을 느꼈다. 봄꽃 구경을 마친 날 늦은 밤 진통이 찾아왔고 집 근처의 한 여성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중랑구청을 찾아 아기의 출생 신고도 마쳤다. 처음 겪은 일련의 과정에 몸도 마음도 마냥 성하지는 않았고 산후 우울증으로 통칭되는 호르몬의 변화 및 복합적인 감정도 찾아왔지만, 가까이에 가족이 있고 의지할 데가 있어 차차 극복할 수 있었다. 

아기와 함께 보낸 봄의 나날을 종종 떠올린다. 친정엄마가 없는 손주가 눈에 밟히셨던 할머니는 연로한 연세로 산후조리를 도맡아주셨고 그 정성 덕분에 나는 빠르게 회복했다. 몸이 점차 안정되면서 봄 산책을 잘 나갔는데, 아기띠에 아기를 안고 동네로 나가면 햇볕이며 바람이 얼마나 부드럽고 산들하던지, 나무와 꽃을 보며 천천히 계절을 음미하며 걷다 오곤 했다. 아기와 함께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매번 우왕좌왕했지만, 내 품에 폭 안기는 아기의 체온이 신기할 정도로 따스해서 자꾸 웃음이 났고, 또 무척 감격스러웠다. 

그 시절 꽃 같던 봄의 나날을 아름다운 중랑에서,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인자하고 다정하신 할아버지 할머니의 곁에서 보낼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나의 신혼, 첫 아이, 첫 육아의 순간순간은 뭉클하고도 사연 많고, 평화롭다가도 매일매일이 우여곡절이었다. 심신이 지칠 때에도 잠시 봉화산 언저리를 걷거나, 중랑천에 들러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뇌도 시름도 사르르 옅어져갔다. 산과 물이라는 자연이 주는 안정감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한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고 토닥여준다. 

언제까지나 아늑한 집에서 상봉 기찻길을 흐뭇하게 바라보실 것만 같던 할아버지는 1년 전 어느 따스하던 봄날 긴 소풍을 떠나셨다. 수십 년의 세월이 구석구석 묻어있는 햇살 좋은 집, 바로 할머니의 곁에서 말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몸이 허약해지기 시작하셨다. 할아버지와 늘 깔끔하게 쓸고닦으며 단란하게 사셨던 집. 대가족 들락거릴 때마다 북적거리며 온기가 넘치던 집. 금슬좋던 배우자가 없어지면 혼자 남은 사람은 쓸쓸하고 약해지는 게 수순인 것인가. 할머니는 몇 개월 전 요양병원에 들어가셨고, 그 따뜻하던 집에는 조용한 햇살과 무거운 적막이 하루를 채우며 흐를 것이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저 멀리 바라보시던 중랑의 기찻길에도, 내가 갓난 아기와 걷던 산책로에도, 할머니가 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걸으시던 동네 오솔길에도 봄의 기운이 퍼진다. 나무가 초록옷을 입고 봄꽃은 하루가 다르게 꽃망울을 내밀며 환한 모습을 한껏 드러낸다. 중랑의 맑은 개천과 산줄기 너머너머에는 자연이 알리는 소리없는 봄의 기척이 만연하다. 수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늘 봄의 일상과 풍경을 상기시켜주는 중랑이다. 가장 젊고 청순한 시절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던 소중한 기억의 공간이다. 

겨울이 길고 힘들었어도 봄을 맞이하는 자세는 달라야 한다. 따스해진 공기와 봄내음, 찬란한 햇볕, 대지가 소생하는 생명력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과정의 연속이고 계절의 반복이며 사람과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가는 여로다. 두 발 딛고 서서 매 해 이리도 아름다운 봄을 맞는다는 것, 눈물나게 사랑스러운 그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며 귀한 축복인가. 나에게 중랑은 황홀하도록 그리운, 따스한 봄날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 나의 시절, 중랑의 봄 맘씨 2021.07.11
184 청경채 기르기 맘씨 2021.07.11
183 핑크빛 발레 슈즈 맘씨 2021.07.11
182 첫 수상 맘씨 2021.07.11
181 사랑니 맘씨 2021.07.11
180 알타리무 맘씨 2021.07.11
179 작은 벚꽃나무 맘씨 2021.07.11
178 구 경성방직 사무동 맘씨 2021.07.11
177 여의샛강생태공원의 봄 맘씨 2021.07.11
176 허겁지겁 먹던 도시락의 추억 맘씨 2021.07.11
175 사라진 떡볶이집 맘씨 2021.07.11
174 변화의 시기 맘씨 2021.07.11
173 수술을 견뎌낸 할머니 맘씨 2021.07.11
172 코로나19 백신 예방접종 후기 맘씨 2021.07.11
171 베란다의 고양이 맘씨 2021.07.11
170 영등포시장역 전시- 다음 역은 사이 숲 맘씨 2021.03.23
169 춘곤증 맘씨 2021.03.23
168 했더래~? 맘씨 2021.03.23
167 슈뢰딩거의 밥 맘씨 2021.03.23
166 경주, 12년 전 기억 맘씨 2021.03.2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Next
/ 10
위로